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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맥 세상] '갈등 공화국'에 역이민 하려면

십 수년 전 여행한 터키는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거의 잊혀졌던 '터키'가 며칠 전 뉴스를 타고 귀에 들어왔다. OECD 27개국 가운데 사회갈등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터키(1.27)라는 내용이었다. 내 느낌이 틀리진 않았구나. 그렇다 치고. 이 기사의 요지는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2위(0.72)란 것이다. 터키는 극심한 종교갈등 때문이라는데 그런 특수 사정이 없는 한국이 왜? 미국은 8위(0.47)로 비교적 높은 축에 속했다. 일본(0.41)은 중간쯤이고 스웨덴(0.28)·핀란드(0.26)·덴마크(0.25)가 가장 낮은 그룹들이다. 평화로운 나라들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소득불균형 지수, 민주주의 수준, 정부의 갈등관리 능력 등 3개 요소를 비교해 지수를 산출했다. 이렇게 높은 갈등지수 때문에 한국은 연간 최대 246조원의 손실을 보고 있단다. 지수를 평균 수준으로만 개선해도 1인당 GDP가 7~21% 상승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밀양 송전탑 설치 논란이 단적인 예다. 6년 전 송전선로 승인이 났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여태 공사를 못하고 있다. 공사 강행과 중단이 반복됐지만 지자체도, 중앙정부도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식의 갈등이 도처에 만연돼도 정치와 행정이 속수무책인 것이 한국의 현주소다. 고려대 박길성 교수는 "한국사회는 갈등의 전람회장이라 할 정도로 일상화 되어 있다. 불쏘시개를 던지기만 하면 폭발할 만큼 위험한 사회"라고 했다. 한국사회에 갈등이 많고 잘 풀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멀리서는 사색당파 전통에서부터 근대의 친일파 청산 실패를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전쟁으로 남북간 증오심이 생겼고, 그에 따른 진보와 보수의 이념대립도 갈등의 씨앗이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주인공 다툼도 마찬가지다. 갈등은 어디나 있다. 그걸 조절하고 해소하고자 정치라는 프로세스가 존재한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는 갈등을 해소하기 보다 증폭·생산시키는 역할을 더 많이 해왔다. 갈등이 풀리지 않는 사회는 피곤하다.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는 '소진증후군'이라는 신종 단어가 생겨났다.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쌓여 기력이 고갈되고 의욕을 잃는 증상이다. 높은 사회갈등지수와 무관치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한국을 포함해 선진 6개국 국민의 좌우 이념 성향을 조사했다. 유럽쪽은 좌익 성향이 높았고, 일본은 우익 성향이 높았다. 한국은 좌(34.8%), 우(33.7%)로 거의 똑같이 나왔다. 음양으로 치자면 기가 막힌 균형이다. 그러나 음과 양이 공존하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립·의존·소장(消長:자기를 소비해 상대를 키워줌)·전화(轉化:궁극에서 상대방으로 변화함)의 4가지 상호관계가 있어야 한다. 대립은 갈등의 요인이지만 의존·소장·전화는 공생의 원리다. 사회갈등지수가 높다는 것은 대립이 지배적이고 공생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뜻한다. 죽어도 내 이익을 지키고 양보를 하지 않겠다는 심리가 팽배한 곳에서 갈등 해소는 요원하다. 갈등을 풀어주어야 할 정치가 갈등을 양육하고 그걸 먹고 사는 기생충 같은 역할을 한다면 더욱 절망적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계기로 전개되고 있는 작금의 한국 정치 생존 방식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으로 역이민을 고려하는 이들이 많다. 온갖 사회적 갈등에 초연할 수 있는 높은 영성을 쌓았거나, 아니면 갈등의 정글에 뛰어들어 승리를 쟁취하는 데 전율하는 성격이 아니라면 역이민은 포기하는 게 좋겠다.

2013-08-28

[진맥 세상] '종북'과 '전라도'라는 불패 무기

한국에는 2만5000여 명의 탈북동포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생존적 이유로 '반북적' 태도를 취하기 십상이지만 남북의 이질적 문화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누리당이 탈북동포인 조명철씨를 19대 비례대표 의원으로 입성시킨 것은 잘한 일이다. '탈북동포 출신 1호 국회의원'이 나온 것이다. 북한에서 정무원 건설부장(건설부 장관)의 아들로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 교수를 지낸 엘리트 출신인 조씨가 한국에서도 파워그룹에 합류한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탈북자들이 차별과 편견에 고통받는 현실을 감안, 탈북동포 채용 할당제 등을 입안하기도 했다.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잘 아는 지식인으로서 앞으로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해 할 일이 많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번 국정조사를 지켜보며 그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현 송파서 수사과장)은 국정원 대선개입 관련 수사과정에서 상부의 수사축소 압력을 폭로했던 인물이다. 조 의원은 권 과장에게 "증인은 광주의 경찰입니까, 대한민국의 경찰관입니까"라고 물었다. 누가 보아도 지역감정을 조장할 의도가 분명한 불필요한 질문을 전국민이 보고 듣고 있는 가운데 내뱉은 것이다. 광주 출신인 권 과장은 사법고시와 변호사를 거쳐 여성 최초로 경정에 특채된 엘리트다. 이번 국정조사에서 당당하고 소신에 찬 답변으로 국정원 대선 개입을 희석시키려는 새누리당을 당혹케 한 인물이다. 권 과장은 "경찰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가 대선에 영향을 미쳤나"라는 질의에 "대선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이 과정(중간 수사 발표)이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부정한 판단"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앞선 증언에서 수사 축소를 지시한 적이 없고 격려전화를 한 것이라고 했던 김용판 전 서울청장의 말에 대해서는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민주당 요원들이 국정원 여직원을 감금했다는 부분에 대해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권 과장은 "당사자와 통화했고, 통로를 열어주겠다고 했다. 감금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명철 의원은 이런 와중에 권 과장에게 '호남 출신'이란 올가미를 씌우는 발언을 한 것이다. 새누리당에선 민주당 문희상 비대위원장이 먼저 '광주의 딸'이란 말을 사용했다며 반박했지만 궁색하다. 한국 정치에서 절대로 배우지 말아야할 '지역감정 이용법'부터 배운 것인가. 남북교류를 위해 그의 독특한 이력을 활용해야 마땅할 판에 혈세로 월급을 받으며 지역감정을 자극해 남남갈등을 조장한 꼴이다. 어떤 네티즌은 조 의원이 지역감정으로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행태를 '간첩 행위'에 빗대기도 했다. 조 의원의 발언은 '종북'과 '전라도'란 불패의 무기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는 한국 기성 수구세력의 저열한 심리를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만명이 국정원 개혁 시위를 벌여도 나몰라라 하고 남북평화대행진에 물대포를 쏘아대는 것도 '전라도 종북 떼거리'로 밀어붙이면 되는 것인가. 실제로 한국의 인터넷 매체에는 '종북'과 '전라도'를 이용해 적군·아군 편가르기 행태가 만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응당 차별과 편견에 맞서야 할 북한 출신 의원이 정의감 넘치는 여자 경찰간부를 지역감정을 이용해 희생양으로 만드는 희한한 풍경이 지금 서울에서 연출되고 있다. 분열과 갈등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판을 치면 정의는 죽어간다. 용감한 권은희에 부끄럽고 간사한 조명철에 개탄스럽다.

2013-08-21

[중앙시론]NLL 논란의 뿌리

NLL 논란으로 한반도의 여름은 뜨겁다. 대체 그것이 무엇이길래 그런가?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영토선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1장 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있다. 헌법상 영토 개념을 따르면 NLL 이남의 바다만이 아니라 이북도 대한민국 주권이 미치는 영역으로 된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대한민국의 현실적 주권은 휴전선에서 막혀 있다. 헌법은 아직도 겨레의 소원과 현실의 괴리를 증언하는 문서로 남아있다. 원래는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이라는 말 뜻 그대로 정전협정 발효 직후 아군 함정의 과도한 북진을 막으려는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의 작전지침으로 설치되었지만 반세기 넘게 세월이 지나면서 사실상의 해상경계선으로 굳어졌다는 게 아마도 정파를 초월해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NLL 인식인 듯하다. 그러나 '사실상(de facto)'이라는 말을 번거롭게 덧붙여야 하는 상황은 도리어 NLL이 법률상(de jure)의 공인 받은 영토선은 아니라는 사정을 반증한다. 사실 NLL은 대한민국 해군에게만 통보되었을 뿐, 가령 동해상의 경계선과 달리 북한과 합의한 것은 아니다. 'NLL은 영토선!'이라고 굳이 명토 박아두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것도 이런 어정쩡함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NLL은 영토선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NLL 이하의 수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지속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영토 확보를 위해 실력 행사에 나서게 되면 서해 바다는 군사 분쟁에 휩싸이게 된다. 휴전선의 서쪽끝을 바다쪽으로 연장한 선이 NLL보다 남쪽을 지나고 그 연장선 이북의 수역을 북한은 자신의 작전구역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도, NLL이 영토선이라고 강변하는 일부 한국 지도자들의 주장을 미국 정부는 지지해줄 수 없다고 거듭 경고했다는 사실이 최근 해제된 비밀문서에서 드러나고 있다. NLL 이하의 수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는 북한측이 묵인해주면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이 주장하는 군사작전 수역과 남한이 실효적 지배를 주장하는 수역이 겹치는 한, 또 다른 연평도 해전의 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정일 전위원장에게 NLL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는가? 결코 공개해서는 안될 국가기밀문서이지만 어차피 공개돼 온 국민이 읽어볼 수 있게 된 정상회담 대화록 전체 녹취록에는 그런 발언이 없다. 그렇다면 그런 취지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은 있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NLL이라는 "괴물 같은" 문제를 해소할 방안으로 광범위한 서해평화협력지대 창설을 제시했다. NLL과 북한의 작전구역이 겹치는 수역에서 군대를 경찰로 대체하고 공동어로구역을 만들자는 김정일 전 위원장의 제안에 대해서, 바로 NLL을 영토선으로 받아들이는 남한사회의 현실적 여건을 들어 거부하면서 내놓는 제안이다. NLL 문제는 남한의 실효적 지배를 인정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준수하면서 남북경제협력을 확대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 NLL이 무의미해지는 단계가 도래하리라는 것이 노 전 대통령의 의중이었던 것 같다. 이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연 NLL을 포기하려고 했는지를 스스로 확인해보는 것은 그간의 논란에 비추어 그 나름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모처럼 읽을 기회가 생긴, 역사적 정상회담 녹취록을 그런 식으로만 읽는 것은 한결 더 보람 있는 성찰의 기회를 놓치는 일이다. 이 정상회담의 기본 의제는 남북의 오랜 적대와 불신을 남북경제협력으로 극복하여, 한반도에 새로운 미래를 열자는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그것을 "군사지도 위에 경제지도를 그리는" 것으로 표현했다. 사뭇 다른 차원의 문제의식이지만 군사적 대립이라는 현실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 없다는 고심 또한 엿보이는 것이다. NLL 논란의 뿌리에는 결국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큰 그림, 장기적 비전의 문제가 놓여 있다. 박근혜정부는 한갓 정권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미래를 희생하려는 것인가? 조 동 호 퀸즈칼리지 교수

201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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